하고 싶은 걸 다 하며 살 수 있을 만큼 성공하고 싶어요

2021년 07월 16일

<미소 ; 짓다>는 미소 우수 고객님들의 삶을 조명하는 인터뷰 시리즈입니다. 미소 서비스를 받는 고객들이 담대하고 열정적으로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설계해 나가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인터뷰 시리즈는 미소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주 3회 연재되며, 금요일에는 전문이 미소 공식 블로그에 게시됩니다.

“부모님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으로 왔어요. 한국에서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몸으로 경험해보고 싶었거든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김강일입니다. 저는 우리나라 특산품 중에서도 명란젓, 건어물 등 수산물을 엄선해서 뉴욕 등 미국 동부로 수출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 영어 이름이 케빈인데 케빈스 초이스(Kevin’s Choice)라는 한국 식품 브랜드를 만들었어요. 뉴욕으로 수출하는 건 제가 그쪽 출신 교포이기 때문이에요. 부모님을 포함해서 학창 시절 인맥이 모두 뉴욕에 있거든요.

 

친구와 가족이 모두 미국에 있는데, 한국에 정착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한국에 온 지는 올해로 10년 차에요. 10년 전에 인터뷰를 했다면 이런 유창한 한국말도 못 했을 거예요. 아주 어렸을 때 미국에 이민을 가서 20년을 살았고, 대학까지 미국에서 졸업했거든요.

대학 졸업하고 만 21살에 취업을 했는데, 문득 ‘내가 미국에서 얼마만큼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까지 미국에서 살면서 인종차별을 당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도요.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뭔가 한계가 명확할 거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찾아보니 실제로 포천(Fortune)지가 발표하는 미국 500대 대기업에 들어가는 곳 중 대표이사가 한국계인 곳은 하나도 없었어요. 아시아계 대표이사는 한 명이었고요. 자연히 ‘내 모국이라는 한국이라는 곳은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바로 부모님께 한국에 가봐야겠다고 말씀드렸죠. 뒤늦게 사춘기가 왔던 거 같아요. 부모님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으로 왔어요. 한국인이 대다수인 나라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몸으로 경험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한국으로 20년 만에 돌아왔는데, 정말 좋더라고요. 편안한 느낌이 들었어요.

한국에 오고 3개월 만에 자원입대 신청을 했어요. 2011년 11월에 입대했죠.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꼭 한국에서 사회생활 경험을 쌓고 싶었는데, 한국 직장을 다니려면 군대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한국에서 학교를 나오지 않은 제가 조직 생활을 시작할 때 군대 경험이 나름의 발판이 됐죠.

한국에 정착하면서 어떤 게 가장 어려우셨나요?

혼자 시작한 한국 생활이니까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죠. 우선 외로웠어요. 친구들과 가족들이랑 다 떨어져 있으니까. 그다음으로는 한국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던 거 같아요. 한국 생활 초반에 영어학원에서 강사로 일했는데, 일부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식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가난한 집 아이들이랑 놀지 말라고 하고, 아이들이 그걸 고스란히 배워 못사는 집 아이들을 따돌리는 걸 봤거든요.

사실 전 어렸을 때 미국에서 가난하게 컸어요. 80년대 후반에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집안이 기울었죠. 그때 배운 건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예요. 부족한 것투성이였지만 행복한 순간들이 많았거든요. 물론 어렵게 자라면서 돈이 너무 없으면 불행하다는 것도 배웠죠. 제가 한국에 와서 놀랐던 건, 한국에서 가난했더라면 훨씬 더 큰일 날 뻔했다는 거예요. 따돌림당하는 것도 그렇지만, 부모의 돈이 아이들 성적과 행복으로 바로 연결되잖아요. 학원 강사를 하면서 부모 재력이 아이들 학교생활과 교육 수준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걸 보며 참 많은 생각이 들었죠.

“한국에서는 사원이 바로 대표와 이야기하면 안 되잖아요. 저희 대표님은 그걸 가능하게 해 주셨어요.”

한국과 미국, 양쪽에서 일해 보셨으니까 두 나라의 차이를 몸소 느끼셨을 거 같아요.

참 많은 게 다르죠. 한국 생활이 정말 좋았지만 제 개인적인 가치관과 맞지 않았던 부분이 하나 더 있어요. 회사에서 능력보다 나이와 경력을 더 중시하는 문화에요. 한국에서 신입 사원이 회사에 입사한 지 2~3년 만에 능력을 입증하고 억대 연봉을 받을 방법이 있을까요? 거의 불가능하죠. 모두 인정할만한 성과를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잘했다고 칭찬받고 연봉이 1000만 원 정도 오른 뒤에 대리나 과장으로 승진되는 게 다겠죠.

반면, 제 미국 친구들은 입사하고 초고속으로 승진한 경우가 꽤 돼요. 입사 후 능력을 인정받고 몇 년 만에 2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20억 원도 넘는 연봉을 받더라고요. 자신의 능력을 성과로 증명하면 얼마든지 어린 나이에 경제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곳이 미국이라면, 한국은 연차와 커리어를 꾸준히 쌓으면서 롱런(long-run)해야 하는 곳인 거 같아요. 저처럼 빠르게 성공을 거두고 싶은 사람들과 맞는 직장 문화는 아니죠.

그런데도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뭘까요?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면 한국을 떠나고 싶으셨을 텐데요.

전역 후 취직한 회사의 대표이사님 덕분이죠. 한국 기업에 대한 제 선입견을 완전히 깨버린 분이셨거든요. 인천 남동공단에 위치한 자동차 반도체 업체였는데, 20대 후반이고 경험도 적은 저에게 유럽과 미국 시장을 뚫으라는 미션을 주신 거예요. 제 가능성만 보고 모험을 하신 거죠.

군대에서 배운 건데, 한국에서는 사원이 바로 대표와 이야기하면 안 되잖아요. 군대에서 이병이 바로 중대장한테 건의하면 난리가 나듯이, 한국 조직에서도 사원이 팀장과 임원진을 제치고 바로 대표에게 보고하는 건 상상하기가 어렵죠. 저희 대표님은 그걸 가능하게 해 주셨어요. 저희 회사로 방문한 외국 바이어들에게 영어로 프레젠테이션하는 제 모습을 보고 해외 영업 담당으로 선발해 주신 거죠. 중견 기업 입장에서는 미국, 유럽 출장 한두 번이 큰 투자이니만큼 경험과 경력이 있는 사람을 뽑기 마련이거든요. 고작 28살인 저에게 기회를 주신 거 자체가 큰 리스크를 짊어진 투자고, 그런 대표이사님을 만난 덕분에 제가 한국에 남아 있게 된 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거 같아요.

저도 처음부터 100% 자신 있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그런데 정말 이게 되더라고요. 삼성, 현대에만 납품하던 중견 부품 업체가 몇 년 만에 몇백억 원씩 독일 폭스바겐과 BMW에 독점 납품을 하는 기업이 됐고, 그걸 일군 사람 중 한 명이 저였다는 거에 엄청난 자부심을 느껴요. 대표님이 보상도 엄청 후하게 해주셨어요. 억대 연봉도 받아보고, 차도 바뀌고요. 그런 재미에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도 못 했죠. 자주 미국으로 휴가와 출장을 보내주시기도 했고요. 그러다가 곧 결혼할 지금 여자친구도 만나면서 한국에 정착하게 됐죠.

"제 나이와 경력에 맞지 않은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기회가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경험 없는 영업 사원으로 유럽에서 크게 성공하셨을까요? 비법이 궁금합니다.

제가 교포였다는 게 해외 영업에 큰 도움이 됐어요. 폭스바겐과 BMW에 납품하려고 하는 중국, 대만, 일본, 한국 업체가 굉장히 많거든요. 독일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동아시아 영업 사원을 만났겠어요. 그런데 저처럼 동양인의 얼굴을 가진 미국인은 처음 봤던 거죠. 제가 가진 특수한 배경 덕분에 유럽인들과 빠르게 친해졌고, 제가 했던 뉴욕 이야기, 어렸을 적 이야기들이 도움이 됐죠.

정말 신나게 일을 했던 것 같아요.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나이에 수트 빼입고, 실컷 프레젠테이션하고, 사교 모임에 나가고, 여러 사람과 이야기 나누고 악수하면서요. 그만큼 저희 대표님이 포상을 해 주셨고요. 대표님과 개인적으로도 빠르게 친해져서 기업 경영도 어깨 너머로 많이 배웠어요. 지금 사업을 하는 것도 그분 덕이 크죠. 수출 계약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관장하는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했으니까요. 모든 단계를 파악하는 눈이 생긴 거죠. 제 나이와 경력에 맞지 않은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기회가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제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탄탄대로를 걸었는데, 왜 퇴사하셨나요? 계속 본인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대표이사님 밑에서 일하고 싶으셨을 거 같아요.

저도 계속 그분 밑에서 일하고 싶었죠. 2017년 즈음까지 한국 부품 업체의 해외 영업 사원으로 최고를 살았고요. 당시에 독일 폭스바겐의 제타와 골프라는 차량의 헤드램프 반도체를 독점 계약하고 돌아왔어요. 폭스바겐 골프는 2017년에 유럽에서 50만 대 가까이 팔렸거든요. 그쪽 프로젝트를 수주한 건 회사의 엄청난 기회였죠. 그때 폭스바겐 쪽 바이어가 했던 말이, 저희 회사 제품 가격이 중국 업체보다 10%가 비쌌데요. 그래도 한국 회사의 기술력을 믿고 하겠다고 한 거죠.

그런데 2017년부터 최저임금이 가파르게 인상됐어요. 2017년에 결정된 2018년 최저임금이 전년 대비 16.4% 올랐어요. 제조업체 단가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인건비라, 2018년부터는 회사가 3% 적자로 전환했고요. 버티다 못해 원청에 부품 가격 5% 인상을 요구했고, 폭스바겐은 가격을 맞춰주지 않고 계약을 파기했어요. 그쪽 입장에서 15% 비싸게 부품을 구매할 이유가 없었던 거죠. 결국 저희 회사는 폭스바겐 계약 건을 잃으면서 부도가 납니다.

2018년은 저한테 좋은 기억일 수가 없어요. 주변의 모든 사람이 망했거든요. 우선 존경하던 대표이사님이 망했죠. 새로운 계약 건을 따 오면서 설비 투자를 늘렸는데, 저희가 설비 업체에 대금 지급을 못 하니까 회사와 계약한 설비 업체들도 줄지어 망했어요. 회사에서 150명이 잘려 나갔고요. 악몽 같은 1년이었죠. 슬픔과 분노에 빠져서 살았던 1년이었습니다.

“미국 부모님 집에서 3개월 정도 가서 지내게 됐는데, 제가 경악을 금치 못했어요. 아버지가 너무 힘들게 일하고 계신 거예요."

현재의 한국 수산물 브랜드를 만들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어떻게 아예 다른 직종에 뛰어드셨나요?

부도난 회사를 나온 뒤, 여러 경쟁 업체에서 러브콜이 왔어요. 한국 자동차 인쇄 회로 기판(PCB) 업체 중에서 유럽으로 수출하는 회사는 저희가 유일했거든요. 그런데 하기 싫더라고요. 리스크를 감수하고 저에게 투자하신 제 대표이사님 같은 분을 만날 자신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제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어떤 회사에 취직하고 싶다’가 아니라, ‘내가 일한 만큼 벌어보고 싶다’와 같은 생각이 들었죠. 월급쟁이로는 꿈을 이루기가 힘들잖아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첫 사업으로 무역 회사 법인을 설립했어요. 그리고 기존에 알던 유럽 바이어들에게 연락했죠. 신뢰가 쌓인 유럽 바이어들에게 한국 자동차 부품 업체들을 소개해 주고, 제가 대신 계약을 따내는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했습니다. 프리랜서로 일하다 보니 회사에 다닐 때보다는 시간이 여유롭더라고요. 그래서 미국 부모님 집에서 3개월 정도 가서 지내게 됐는데, 제가 경악을 금치 못했어요. 아버지가 너무 힘들게 일하고 계신 거예요. 그때 좀 눈물이 나더라고요.

내가 한국에서 커리어를 쌓고,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할 만하게 지내고 있었지만, 정작 소중한 가족한테 너무 소홀하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아버지가 용돈 벌이 느낌으로 한국 수산물 수입 사업을 작게 하고 계셨는데, 그걸 도와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아버지한테 제안을 드렸습니다. 수입, 수출 관련 업무는 제가 맡아서 하겠다고요. 처음에는 조금만 도와드리려고 시작한 일이 점점 커지면서 지금까지 이르게 됐네요.

아버지와 함께 일하게 되셨는데, 어떠세요? 오히려 힘든 건 없나요?

전혀요. 부모와 자식은 최고의 조합이에요. 정말 가족이 제일 중요한 거 같아요. 함께 사업을 하면서 더더욱 절실히 느껴요. 완전한 신뢰의 관계는 가족밖에 없거든요. 서로 더 받으려고 거짓말을 하거나 속이려는 게 없잖아요. 그래서 요즘 정말 행복해요. 전 회사 대표이사님과 함께했던 이후로 믿을 수 있는 사람과 일하는 행복한 기분을 잃어버렸거든요. 그런 기분을 요즘 다시 느껴요.

“회사를 100명, 200명 규모로 키워서 나중에 저도 저한테 잘해 주셨던 대표이사님 같은 멘토가 되고 싶어요."

대표님이 지금 정확히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 알려주세요.

한국에서 외국 바이어의 일을 하고 있어요. 우리나라 수산물을 선별해서 구매한 뒤 미국으로 보내는 거니까요. 미국으로 가져갈 수산물의 매입 관리, 품질 관리, 조달 관리가 제 역할이죠.

한국의 소규모 수산물 가공 업체에게 수출길을 열어주는 일이기도 해요. 제가 한국에서 7~8년가량 일을 하면서 중견, 중소기업이 가진 제약을 몸소 피부로 느꼈어요. 삼성, LG, 현대 등 대기업이 아닌 중견, 중소기업이 직접 수출을 하기란 정말 어렵거든요. 대부분이 대기업의 하청 업체에 그치고 있죠. 그래서 전 국내에 있는 소규모 기업에 힘을 실어주고 싶었어요. 당신네 회사가 대기업은 아니지만 충분히 수출도 하고 성장해 나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죠.

소규모 수산물 가공 업체들 중에 최고급의 제품을 만드는 장인들이 계세요. 이분들은 대단한 물건을 만들지만 수출할 줄을 몰라요. 그래서 제가 이 과정을 통째로 맡아서 수출 과정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대신해드리고 있습니다. 계약부터 대금 결제, 운송, 보험, 관세, 통관, 식료품의 미국 식품의약안전처(FDA) 승인까지 다 도맡아 하는 거죠. 이렇게 작은 업체의 사장님들이 나도 수출한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고 싶었어요. 충분히 자랑스러워하실 만한 제품을 판매하시면서 대규모 자본에 치이며 제값을 못 받는 일도 없게 하고 싶었고요.

다행히 저와 함께 일하시는 사장님들이 다들 좋아하세요. 조그마하게 사업하시던 분들이 훨씬 큰 시장에 발판을 마련했다는 거에 자부심을 느끼고, 저도 그분들과 함께 성장하는 거에 보람을 느껴요. 그분들이 좋아하시는 모습을 볼 때 저도 제일 기분이 좋아요.

사업체를 경영하시는 건 이번이 처음이시잖아요. 어떤 점이 제일 어려우세요?

제가 창업을 해 보니까 가장 힘든 게 책임감이에요. 이제 두 명의 직원을 두고 있는 사업체를 맡다 보니, 매달 직원분들 월급을 지급해야 한다는 게 생각보다 큰 압박이더라고요. 회사가 잘 되든 잘 안 되든, 월급은 무조건 나가야 하는 고정 비용이니까요. 직원으로 일할 때나, 프리랜서로 일할 때는 전혀 몰랐죠. 한 명의 직원을 더 뽑는 일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걸요.

돈이 나가서 무서운 게 아니에요. ‘내가 월급을 못 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두려움을 만들고, 그 무서움이 큰 책임감을 만들거든요. 생각해 보면 저는 2명만 책임지면 되잖아요. 그렇다면 500명, 1000명 직원들의 월급을 책임지고 있는 사업체의 대표들은 참 대단한 사람들인 거 같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요. 그분들은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다를 거예요.

지금 제가 운영하는 회사를 100명, 200명 규모로 키워서 나중에 저도 저한테 잘해 주셨던 대표이사님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저보다 젊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또 의지와 능력이 있는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그런 멘토요. 참 꿈이 크고 방대한 건 맞는 거 같아요. 하지만 계속 이렇게 큰 꿈을 가지려고요. 내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정말 끝인 거거든요. 안주하거나 포기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거고요.

“돈에 목매진 않아요. 다만 제가 하고 싶은 걸 전부 하고 싶어요.”

대표님의 개인적인 꿈, 목표, 도달하고 싶으신 지점이 궁금합니다.

월급쟁이라고 하잖아요. 월급을 받아서는 하고 싶은 일들을 다 하면서 살기가 불가능하니깐 그렇게 부르는 거 같아요. 저는 그렇게 참으면서 살고 싶지 않아요. 금전적인 부분에 대한 제한을 사라지게 만드는 게 저희 최종 목표이자 도달하고 싶은 지점이 아닐까 해요.

돈에 목매는 건 절대 아니에요. 다만 제가 하고 싶은 걸 전부 하고 싶어요. 서울 강남에 몇십억 원짜리 아파트를 사는 건 제 목표가 아니에요. 그건 아무 의미가 없거든요. 전부 다 하고 싶다면서 꿈이 그렇게 소박하면 안 되는 거 같아요. 면세점에서 아무렇지 않게 롤렉스 시계를 사고, 여행 다닐 때 내 돈으로 비즈니스석을 끊고, 내 자식이 좋은 대학을 가면 학비 걱정 없이 보태주고, 미국 맨하탄에 기회가 되면 아파트를 사는 게 제 꿈이에요.

지금 함께 일하는 업체 사장님들처럼 수출하고 싶은데 방법을 못 찾는 분들을 돕는 것도 제가 하고 싶은 일 중에 하나에요. 그분들의 판로를 뚫어드리면서, 같이 커나가고 같이 돈을 벌고 싶은 거죠. 제가 영업 팀에서 일하면서 깨달은 건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거든요. 아무리 영업 사원의 재주가 뛰어나도 파는 제품이 별볼일 없으면 계약을 따낼 수가 없잖아요. 좋은 제품을 만드는 건 제 능력 바깥의 일이고요. 그래서 다 같이 잘 돼야 하는 거 같아요.

물론 버는 거에 맞춰서 사는 삶이 나쁘다고 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버는 돈에 맞춰서 행복을 찾는 게 가능하다면 저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하지만 전 하고 싶은 걸 조금이라도 참으면 화가 나는 사람이더라고요. (웃음)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하려고 돈이 벌리는 방법을 찾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미소를 쓰고 사는 게 많이 바뀌었죠. 더 가치있는 일을 할 수 있는 4시간을 매주 벌게 된 셈이잖아요."

미소를 쓰시기 전, 집안일은 어떻게 하셨나요?

미소 서비스를 사용하기 전에는 회사 기숙사에 살았어요. 그때의 제 방 모습을 보신다면 절 안 만나실 수도 있어요. (웃음) ‘사람 같지 않게 하고 사는구나’라고 생각이 드실 테니까요. 설거짓거리가 쌓여서 개수대에 넘치면 그때야 그릇을 닦고, 입던 옷도 던져놨다가 다시 입고, 그렇게 지저분하게 살았거든요.

아파트로 이사하고 나서는 더는 그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집이 커져서 관리도 어려웠을뿐더러, 이제 사업을 시작하게 되면 집에 가끔 손님들도 오실 거니까요. 그래서 처음 미소 서비스를 사용하게 된 거였어요. 청소만 요청했는데, 널브러져 있던 양주병들을 다 진열해 주시고, 정말 사람 사는 집을 만들어 주셨죠.

 

벌써 100회 넘게 미소를 사용하셨잖아요. 미소가 어떤 좋은 경험을 드렸나요?

미소 쓰고 사는 게 많이 바뀌었죠. 클리너분들은 삶에 정말 좋은 영향력을 행사해 주시는 거 같아요. 저는 정기로 1주일에 한 번 가사도우미 서비스를 받는데, 계속 쓰다 보면 공휴일에 클리닝을 받는 날이 돌아오기도 하잖아요. 그런 날에는 저도 집에서 쉬는데, 클리너님을 일하시는 걸 보면 마음이 쓰이니깐 제가 돈을 드리고 쉬시라고 했어요. 공휴일 날 직장인들이 돈 받고 쉬는 것처럼, 저희 집에 오시는 클리너분들도 그렇게 즐기시는 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때부터 정말 더 잘해주시더라고요. 어느 날 집에 오면 베갯잇이 바뀌어 있었고, 연잎밥 정식을 차려 놓고 가신 적도 있었고요. 그럼 저도 청소하고 집에 가시는 길에 설렘을 만끽해 보시라고 저희 회사가 수출하는 명란젓 하나 준비해 드리고, 10만 원 상품권 하나 끼워 드리고 했죠. 뭔가 가족이 된 거 같잖아요. 정말 한국 이모가 한 명 생긴 느낌이었어요. 만약 미소가 없어진다면 저는 아쉬워하면서 또 다른 업체를 열심히 찾겠죠. 그 정도로 미소는 제 삶의 일부분이 됐어요.

미소를 쓰면 제가 인생에 더 중요한 부분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거 같아요. 집이 깨끗해지는 건 당연히 좋지만, 제가 그 시간에 청소하지 않고 더 가치가 높은 사업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게 더 좋아요. 1주일에 4시간을 벌게 되는 셈이잖아요. 가사도우미 서비스에 적절한 대가를 지급할 의사가 있는 저 같은 사람은 클리너분들에게 기꺼이 제대로 된 노동의 대가를 지급할 의사가 있어요. 저는 솔직히 제가 얻는 가치에 비해 미소 서비스가 너무 저렴하다고 생각해요. 가격을 올리셔야 하지 않을까요? (웃음)

“사는 게 전쟁터라, 잠깐 한산한 순간들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됐어요. 여유로움을 맛볼 때 성취감 같은 것도 느껴요.”

요즘 행복하다고 느끼시는 순간들은 언제인가요?

비수기에 여행을 떠날 때요. 여행 자체도 좋지만 어디 가려고 예약할 때요. 제가 이제 어느 정도 이뤘기 때문에 여유롭게 평일에 시간 내서 훌쩍 떠날 수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인 거 같아요. 마음의 여유를 찾게 되는 순간이죠. 사는 게 전쟁터라, 잠깐 여유로워질 수 있는 순간들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됐어요. 열심히 달리는 삶에 잠깐 찾아오는 한산함을 맛볼 때 성취감 같은 것도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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